2023 나의 조각, 조각, 조각

지금까지 나를, 그리고 나를 규정짓는 어떤 것들을 줄곧 덩어리로 표현해오던 나는 이 파편적이고 독립적인 모호한 것들을 다시 ‘조각’으로 분리시키기로 한다. '나'라는 덩어리를 깍고彫 새기면서刻 자연스레 조각彫刻의 의미를 획득한 이 조각들을 통해 떨어져나간 평면과 떨어져 나온 조각들이 하나의 공간에서 공존할 수 있는 화면을 만든다.
하나의 덩어리로 그려진 화면은 다시 작게 해체되어 조각이 되고, 이 조각들은 다른 화면 위에서 구성되어 또 다른 덩어리가 된다. 하나라고 생각했던 몸과 마음처럼, 떨어지지 않을 것이 보이던 물감과 지지체는 분리되어 다르게 구성된다. 이는 주어진 공간을 강제하는 회화라는 프레임의 폐쇄성 안에 세계를 국한하지 않고, 신체와 연동하여 삶과의 경계를 좁혀 나가는 이미지로 매만져진다. 이는 몸으로서의 단단한 지지체 대신 피부이자 살, 연약한 껍질로서 이미지들이 상호 교류하며 또 교환되기도 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나는 덩어리가 조각이 되고 조각이 또다시 덩어리가 되는 이상한 순환의 과정을 개념과 물질로서 화면에 정착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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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에 빗대어 자신을 표현하던 나는 신체의 문제로 얼마간 작업을 진행하지 못했고 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안’을 향했다. 이때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신체’였다.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고 생각했던, 몸과 마음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치면서 나는 신체 또한 하나의 틀, 속박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어떤 움직임, 몸짓들이 그 틀에서 벗어나기 위한 아우성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나는 밖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 안을 향할 때 ‘몸’ 이라는 소재와 마주하게 된다.

이런 고민은 지속적으로 해오던 자연에 대한 고민과 함께 뒤섞여 신체라는 것, 자연이라는 것,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이 아닌, 불명확하게 조합되고, 억지로 끼워 맞춰지고, 싱크가 틀어지는 과정에 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는 신체, 자연의 유용과 결합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져 신체, 몸이라는 진부한 이야기를 다시 화두로 놓으면서 우리가 어떤 것에 결박되고 갇혀왔는지를 생각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이미지는 두개의 화면에서 시작된다.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유기체로 생각되던 화면은 해체되어 다른 화면에 꼴라주 형식으로 붙어 다시 하나가 된다. 어긋난 듯 보이는 하나의 화면은 두개, 또는 그 이상의 이미지를 함축한 채 하나의 덩어리로 구현된다.
여기서 장지라는 물질성은 조각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는데 큰 역할을 하는데 장지 위에 올라간 물감은 장지 특유의 ‘겹’이라는 물성을 통해 아주 얇은 막으로 분해된다. 이를 통해 다른 덩어리에 이질감없이 안착하며 새로운 피부이자 껍질로 작동한다.




2020 pair, 또는 포개진 .


2019 선잠과 un-cast


2018 remove or stack, pause-cleaning

나는 공고한 사회 안에서 단단하지 못한 경계인이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자리가 어디인지, 나는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하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묻는 불안한 경계인. 그런 상황에서 내가 보게 되는 모든 풍경은 나와 닮아있었다. 그렇게 나는 자리잡지 못한 경계인이 마주치는 그와 닮은 풍경을 그려왔다. 그렇게 외부요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작업을 진행하던 중 나는 내부의 요인에 의해 모든 게 멈추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회의 끝, 가장자리의 선에 서있던 나는 경계와는 멀찍이 떨어져있게 되었고 점점 경계의 선은 흐려져갔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마주치는 대상을 흐리게 그려넣거나 지워가고 널어놓기보다는 쌓아가며 <Pause-cleaning>시리즈를 진행하고있다.




2017 ( )으로 가는 길 way to ( )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작업실을 사용할 때 밤에 웅웅거리는 소리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다. 언젠가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아 봤는데 그 소리는 ‘대남방송’이었다. 반공교육을 받지 않은 나에게 개념으로만 존재하던 ‘북한’은 그렇게 나의 살갗에 내려앉았고 내려 앉은 존재에 다가가려하자 바로 가로막혔다. 우리는 이념의 경계와 지리적 경계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 후 부터 매일 그 ‘사이경계’를 찾아 북한을 보러 다녔다. 북한을 보러가는 길은 삶에 스민 경계처럼 아무렇지 않는 풍경이었다. 나는 전혀 다르지않는, 평범하지만 비범한 속내를 가진 풍경을 그리며 삶에 스치듯 스민 어떤 경계를 표현하고 싶었다.
When using a studio in Paju, Gyeonggi-do, I couldn't sleep because of the buzzing noise at night. The sound source was “Daenam Broadcasting”. 'North Korea', which existed only as a concept, came so close, but soon the road to North Korea was blocked.We were located between the ideological and geographical boundaries.Every day, The road to see North Korea was a casual landscape like a boundary that permeates life. I wanted to express a certain boundary as if passing through life by drawing a landscape that is not different at all and has a normal but extraordinary inside.



2016 텅 빈 바다 the empty ocean



2015  우리라는 우리 the quite trip

나는 미완의 인식에서, 개척의 변두리에서, 현재로 가는 길목에서 나를 닮은 풍경을 만난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 나에게 덮어 씌어놓았던 겹을 하나씩 벗어내고 맨살을 드러내려하고 있다. 나의 맨살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을 닮은 이런 풍경을 화면으로 옮기는 일은 마치 자화상을 그리는 것처럼 경계에선 나를 표현하는 일이며 어떤 힘에 의해 움직인 내가 제자리에 서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뭔지 모르는, 확실하지 않은 나의 감정, 역할, 자리가 내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기분 등은 먼 곳의 감정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감정을 억누르고 주입된 인식을 가지고 사회적 기준에 맞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해왔다. 나는 이런 맹목적인 주입과 강요의 뒷켠에서 잊혀져간, 나조차도 외면한 감정에 주목하려고 한다. 어느 순간 눈을 돌렸을 때 마주하는 나와 닮은 풍경이 진짜 개인적인 풍경으로 자리할 때 나의 작업은 시작된다.I meet a landscape that resembles me in unfinished perception, on the outskirts of pioneering, on the road to the present. Now, I am trying to reveal my bare skin by taking off the layers that someone has overlaid on me one by one. Moving this landscape, which resembles the anxiety and fear of my bare skin, to the screen is like drawing a self-portrait, expressing myself at the border, and I think that it is the moment when I stand in place, moved by a certain force. I don't know what, my unclear feelings, roles, and feelings that my seat isn't mine aren't distant emotions. However, we have tried to repress these emotions and live a life that meets social standards with infused perceptions. I try to pay attention to the feelings that even I have turned away from behind this blind infusion and coercion. When I look back at some point, my work begins when the landscape that resembles me becomes a real personal landscape.



2014 닫힌 방 how can I get out of here

“그것은 최고의 시기였다, 그것은 최악의 시기였다, 지혜의 시대이기도 했고, 바보들의 시대이기도 했고, 믿음의 시대였고, 불신의 시대였다,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고, 아무것도 갖지 못하기도 했다, 우리 모두는 천국으로 향하고 있었고, 또 반대로 가고 있었다.”
- 두도시이야기/ 찰스디킨스 중 발췌

나는 그림을 통해 한 인간이 가지는 두 가지 지위, 위치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만의 ‘자리’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간극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지금 나의 시선에서 그리려고 노력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내가 느끼는 사회적 나와 개인으로서의 나의 간극을 통해 이 시대의 젊은이의 시선을 보여주려 한다.
다분히 자전적으로 표현되는 나의 그림은 내가 느끼는 감정, 내가 느끼는 괴리감 등을 통해 철저히 서른 살의 김선영, 그림을 그리는 김선영이 느끼는 막막함, 불안함 등의 불확실성을 기반으로 표현된다. 나는 이렇게 서로 치환 되지 못하는 감정, 나를 투영해 대상을 바라로는 시각들로 인해 생기는 오해들. 큰 불화, 싸움이 아닌 잦은 오해와 얕은 이해로 대상을 규정해버리려는 행동들 속에서 생기는 아무곳에도 속하지않는 감정을 그린다.
우리는 누구나가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상대방을 이해하기에 생기는 많은 오해 안에서 살고 있고 나의 작업은 이런 생활, 진실하지 못한 감정의 홍수 속에서 일어나는 나의 감정을 담는다. 사회가 나라는 하나의 대상에 바라는 기대와 성과. 그리고 그것을 ‘올바른’방향으로 성취하지 못했을 때에 받게 되는 사회와 주변의 ‘의례적인’위로에 대한 작업을 진행한다. 또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내가 갖는 세상과 나에 대한 이미지에 대해 나와 굉장히 밀접한 부분에서 계속 작업할 계획이다.
또한 이러한 ‘감정’을 다루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배경이 되는 사회상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특히 우리가 ‘자유’를 획득하게 됨으로써 더 속박되고 움츠려드는 양상에 주목한다.
따라서 자유가 가져오는 불안, 불확실함등을 깊이 탐구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대인의 특성을 그린다.
나는 그림을 통해 나의 사적 시선을 공적 시선으로 돌리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이며 개인과 사회, 공동체적 목표 안에서의 개인의 삶을 더욱 심도있게 연구하고 사회가 품지 못하는 개인의 감성을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고민을 이어 갈 것이다. 이러한 나의 작업은 작가의 작업을 ‘전시’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완성되는 인생관과 결부시킨 방향을 지니고 있어 긴 호흡을 가지고 끌고 나가야 할 주제이다. 또한 기기, 정보 통신 등의 발달로 점점 더 자신의 감정에 소홀해지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조금 더 자신에 감정에 충실하고 과연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의 자리는 어디인지 묻는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3 나의 자리 where is my position 
...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난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태양 아래 살고 있는 것이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조각은 아닐까?
악마는 존재하는지, 악마인 사람이 정말 있는 것인지,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떻게 나일까?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만 나일 뿐인데 그것이 나일 수 있을까..


아이의 노래 - Peter Handke


작업이라는 세계안으로 들어오면서 나의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의 방향은 아마 제법 다른 방향을 향하게 된 것같다. 나는 이 두 자아가 함께 위치 할 나의 ‘자리’를 찾는다. 어떤 단어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주변의 풍경에서 시작하기도 하며 나와 이야기하는 너의 표정에서 시작하는 모든 것들은 불안함과 불확실함을 업고 화면으로 흘러들어온다. 보다 어두운 색채를 가지고 나의 자리를 찾는 무거운 한 발을 붓으로 내딛는다. 망설이며 내딛은 발자국은, 아니 붓질은 보다 단호하지만 알고있는 답을 어렵게 적듯 조심스럽다.
아는 것도 모르고 모르는 것도 모르는 나의 화면이 부디 좀 더 솔직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