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라는 벽, 우리라는 통로
이슬비(미술비평)/ 2015
이슬비(미술비평)/ 2015
다소 어두운 색채,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태도, 김선영의 작업은 특유의 감성으로 어필하지만 개인 취향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작가는 개인과 사회의 상호관계에서 어떤 해답을 찾기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개인의 감정을 어루만지고 회화적 사유를 통해 이 문제를 풀어나간다.
나의 피부, 우리의 피부
첫 번째 개인전 <나의 자리>가 자아와 회화의 위치를 모색하는 다양한 과정을 담아낸 것이라면 두 번째 개인전 <닫힌 방>에서는 폐허를 배경으로 유난히 웅크리고 있는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이 같은 인물의 태도는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행위로만 볼 수 없다. 나아갈 방향을 잃고 땅바닥에 버려진 종이배처럼, 웅크리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와 혹은 어딘가와 닿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이때 나를 지키는 행위는 다시 외부로 뻗어나기 위한 숨 고르기에 해당한다. 나의 자리는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숨을 수 있는 개인의 은신처이자 세상과 호흡할 수 있는 하나의 숨구멍이다.
김선영의 회화에 나타나는 인체의 피부 표현은 인상적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신체는 외부 상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이자 심리학자인 디디에 앙지외(Didier Anzieu)는 피부가 신체를 감싸듯, 자아가 심리 전체를 감싼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자아를 피부에 비유하고, 그러한 특성을 강조해 ‘피부자아’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피부는 나 자신과 세상의 ‘경계’가 되는데, 이때 경계란 폐쇄적인 ‘벽’이 아니라 무수한 신호에 대해 항상 열려있는 감각적인 장소를 의미한다. 즉,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인 것이다. 하지만 피부는 신체의 가장 외부에 있어 쉽게 손상될 수 있는 연약한 기관으로, 피부자아 역시 안정된 자아가 아니라 외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불안정한 존재이다.
김선영의 기존 작업이 자아와 세상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풍경이 중심을 이룬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신도시에 사는 작가는 자주 산책을 하며 주변의 아파트 신축 공사 현장을 목격한다. 아파트가 한참 올라가는 곳 인근에는 베어진 나무들이 몇 달이 지나도록 그 자리에 폐목이 된 채로 쌓여 있다. 목적이 사라지면 버려지는 존재들. 작가는 버려진 풍경을 단지 지나치는 풍경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 우리 삶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도시는 피부처럼 우리를 덮고 있어 매우 익숙하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낯선 땅의 이방인이 된 것처럼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도시의 삶은 효율과 편의를 추구하며 필요한 것은 남기고 나머지는 배제하는 방식으로 삶의 기억을 파괴하고 타자화된 삶을 파괴한다.
한국 사회에서 개인과 집단의 관계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해왔다. 개인들은 특정 집단에 안주하며 소속감을 기르거나 그것에 대한 거부와 반발을 하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견고해진 사회적 틀 속에서 밀려진 삶들은 제대로 발언조차 하지 못한다. 게다가 오늘날 손가락만 터치하면 모든 것이 피상적인 정보로 접근 가능해지면서, 타인의 삶을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만지고 느끼는 촉각적인 감각이 점점 퇴화하고 있다.
최근 경제 논리가 심화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삶에 맞서기 위해 ‘공동체’와 ‘연대’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나’와 ‘너’의 확인 이후 ‘우리’의 문제로 도약한다. 김선영의 사유에서 흥미로운 것은 ‘나의 자리’, ‘닫힌 방’, ‘우리라는 우리’라는 개인전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지속적으로 ‘경계’의 문제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특히 ‘나’의 입장에서 ‘너’를 구체적으로 호명하지 않고 ‘나를 제외한 모든 것’으로 열어 놓는다. 사실 ‘나’와 ‘너’의 관계는 단순히 거울에 비친 동등한 존재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다르게 인식되어야 한다. 작가는 나의 투영으로 너를 쉽게 이해하기보다 나로 투영되지 않는 오해들에 집중한다.
작업에서 자주 등장하는 흰색의 선, 깃발은 나와 우리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확인되는 경계와 목표에 관한 상징물일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항상 우리의 경계와 연관되며, 배제의 문제와 직결된다. 우리의 안과 밖에는 항상 배제되는 타자들이 존재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명확하지만 모든 것의 경계에는 흔들림이 있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그것은 이쪽과 저쪽이 서로 스며들어 있는, 양극을 수렴하는 모호한 장소이다. 나의 경계가 모호하듯이 우리의 경계 역시 모호하다. 살아있는 한 나의 피부가 들숨과 날숨의 순환을 반복하듯이 우리라는 피부 역시 타자를 향해 열림과 닫힘을 반복해야 한다.
회화라는 표면
김선영의 초기 작업은 사진이었다. 자신을 매혹한 장면을 찍고 인화된 사진의 표면을 긁어내고 벗기는 방식이었다. 사진이 세상을 담아내는 장치라면 표면에 재료가 닿거나 자신의 행위를 기입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특별한 의미, 진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감정이 시작되는 자리에서 멀어지고, 작업을 위한 사진에 머무르자 처음의 나와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회화였다. 아무것도 없이 혼자 남겨진 상황에서 그림은 작가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상황을 더욱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매체였다.
첫 개인전 이후 작가는 지금까지 개인전을 통해 회화를 집중적으로 선보인다. 회화라는 매체는 작가의 몸이 가장 중요한 매개이자 도구이다. 김선영은 자신이 상상한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본 장면을 그림으로 담아낸다. 하지만 그리는 과정에서 새로운 감각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작가가 바라본 현재에서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인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험되는 총체적인 감각들이 작가의 몸을 거쳐 그림에 스며든다.
김선영은 화판을 세워 빠른 속도로 그려나간다. 물감의 얼룩, 흘러내림, 흩뿌림은 배경과 형태를 구분하는 미묘한 경계를 만들면서 화면 안에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가능한 것’을 포착해낸다. 회화라는 얇은 막은 작가의 신체와 심리를 담아내는 싸개이면서 동시에 세상과 소통하는 피부에 가깝다. 관객이 그림을 통해 어떤 감정을 느꼈다면 작가의 들숨과 날숨이 반영된 회화의 존재 자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 새로운 존재를 담아내지만, 자신이 만든 예술이라는 덫에 포획되기도 한다. 요즘 예술계에는 지원금 제도, 시상 제도 등 경쟁구도가 만연하다. 예술가는 기존의 사회 구조에 편입하기 위해 다른 예술가와 겨루는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갱신의 의지를 드러내며 스스로와 싸우는 사람이다. 예술가라는 존재는 자신의 회화 표면에 구멍을 내고 새로 그리는 반복을 통해 성장한다. ︎
나의 피부, 우리의 피부
첫 번째 개인전 <나의 자리>가 자아와 회화의 위치를 모색하는 다양한 과정을 담아낸 것이라면 두 번째 개인전 <닫힌 방>에서는 폐허를 배경으로 유난히 웅크리고 있는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이 같은 인물의 태도는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행위로만 볼 수 없다. 나아갈 방향을 잃고 땅바닥에 버려진 종이배처럼, 웅크리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와 혹은 어딘가와 닿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이때 나를 지키는 행위는 다시 외부로 뻗어나기 위한 숨 고르기에 해당한다. 나의 자리는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숨을 수 있는 개인의 은신처이자 세상과 호흡할 수 있는 하나의 숨구멍이다.
김선영의 회화에 나타나는 인체의 피부 표현은 인상적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신체는 외부 상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이자 심리학자인 디디에 앙지외(Didier Anzieu)는 피부가 신체를 감싸듯, 자아가 심리 전체를 감싼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자아를 피부에 비유하고, 그러한 특성을 강조해 ‘피부자아’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피부는 나 자신과 세상의 ‘경계’가 되는데, 이때 경계란 폐쇄적인 ‘벽’이 아니라 무수한 신호에 대해 항상 열려있는 감각적인 장소를 의미한다. 즉,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인 것이다. 하지만 피부는 신체의 가장 외부에 있어 쉽게 손상될 수 있는 연약한 기관으로, 피부자아 역시 안정된 자아가 아니라 외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불안정한 존재이다.
김선영의 기존 작업이 자아와 세상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풍경이 중심을 이룬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신도시에 사는 작가는 자주 산책을 하며 주변의 아파트 신축 공사 현장을 목격한다. 아파트가 한참 올라가는 곳 인근에는 베어진 나무들이 몇 달이 지나도록 그 자리에 폐목이 된 채로 쌓여 있다. 목적이 사라지면 버려지는 존재들. 작가는 버려진 풍경을 단지 지나치는 풍경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 우리 삶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도시는 피부처럼 우리를 덮고 있어 매우 익숙하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낯선 땅의 이방인이 된 것처럼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도시의 삶은 효율과 편의를 추구하며 필요한 것은 남기고 나머지는 배제하는 방식으로 삶의 기억을 파괴하고 타자화된 삶을 파괴한다.
한국 사회에서 개인과 집단의 관계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해왔다. 개인들은 특정 집단에 안주하며 소속감을 기르거나 그것에 대한 거부와 반발을 하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견고해진 사회적 틀 속에서 밀려진 삶들은 제대로 발언조차 하지 못한다. 게다가 오늘날 손가락만 터치하면 모든 것이 피상적인 정보로 접근 가능해지면서, 타인의 삶을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만지고 느끼는 촉각적인 감각이 점점 퇴화하고 있다.
최근 경제 논리가 심화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삶에 맞서기 위해 ‘공동체’와 ‘연대’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나’와 ‘너’의 확인 이후 ‘우리’의 문제로 도약한다. 김선영의 사유에서 흥미로운 것은 ‘나의 자리’, ‘닫힌 방’, ‘우리라는 우리’라는 개인전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지속적으로 ‘경계’의 문제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특히 ‘나’의 입장에서 ‘너’를 구체적으로 호명하지 않고 ‘나를 제외한 모든 것’으로 열어 놓는다. 사실 ‘나’와 ‘너’의 관계는 단순히 거울에 비친 동등한 존재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다르게 인식되어야 한다. 작가는 나의 투영으로 너를 쉽게 이해하기보다 나로 투영되지 않는 오해들에 집중한다.
작업에서 자주 등장하는 흰색의 선, 깃발은 나와 우리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확인되는 경계와 목표에 관한 상징물일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항상 우리의 경계와 연관되며, 배제의 문제와 직결된다. 우리의 안과 밖에는 항상 배제되는 타자들이 존재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명확하지만 모든 것의 경계에는 흔들림이 있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그것은 이쪽과 저쪽이 서로 스며들어 있는, 양극을 수렴하는 모호한 장소이다. 나의 경계가 모호하듯이 우리의 경계 역시 모호하다. 살아있는 한 나의 피부가 들숨과 날숨의 순환을 반복하듯이 우리라는 피부 역시 타자를 향해 열림과 닫힘을 반복해야 한다.
회화라는 표면
김선영의 초기 작업은 사진이었다. 자신을 매혹한 장면을 찍고 인화된 사진의 표면을 긁어내고 벗기는 방식이었다. 사진이 세상을 담아내는 장치라면 표면에 재료가 닿거나 자신의 행위를 기입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특별한 의미, 진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감정이 시작되는 자리에서 멀어지고, 작업을 위한 사진에 머무르자 처음의 나와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회화였다. 아무것도 없이 혼자 남겨진 상황에서 그림은 작가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상황을 더욱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매체였다.
첫 개인전 이후 작가는 지금까지 개인전을 통해 회화를 집중적으로 선보인다. 회화라는 매체는 작가의 몸이 가장 중요한 매개이자 도구이다. 김선영은 자신이 상상한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본 장면을 그림으로 담아낸다. 하지만 그리는 과정에서 새로운 감각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작가가 바라본 현재에서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인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험되는 총체적인 감각들이 작가의 몸을 거쳐 그림에 스며든다.
김선영은 화판을 세워 빠른 속도로 그려나간다. 물감의 얼룩, 흘러내림, 흩뿌림은 배경과 형태를 구분하는 미묘한 경계를 만들면서 화면 안에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가능한 것’을 포착해낸다. 회화라는 얇은 막은 작가의 신체와 심리를 담아내는 싸개이면서 동시에 세상과 소통하는 피부에 가깝다. 관객이 그림을 통해 어떤 감정을 느꼈다면 작가의 들숨과 날숨이 반영된 회화의 존재 자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 새로운 존재를 담아내지만, 자신이 만든 예술이라는 덫에 포획되기도 한다. 요즘 예술계에는 지원금 제도, 시상 제도 등 경쟁구도가 만연하다. 예술가는 기존의 사회 구조에 편입하기 위해 다른 예술가와 겨루는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갱신의 의지를 드러내며 스스로와 싸우는 사람이다. 예술가라는 존재는 자신의 회화 표면에 구멍을 내고 새로 그리는 반복을 통해 성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