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고백
김노암(아트스페이스 휴 디랙터)/ 2017
김노암(아트스페이스 휴 디랙터)/ 2017
1. 폭풍이 부는
폭풍의 언덕, 영국식 해안의 절벽. 태풍이 불기전에 스산하면 꿀꿀한 날씨의 풍경들 가운데 그나마 가장 밝은 풍경을 고른 듯하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폭풍이 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언덕 위에 서있다. 마치 비장한 거대서사가 시작되기 직전의 전조(前兆)처럼 얼룩처럼 이미지가 번지고 치솟으며 펼쳐진다. 심상을 표현한 이미지 같지만 작가에 따르면 작품은 거의 실제 경험을 기반으로 제작됐다. 시리즈를 통해 점차 밝은 색조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일관되게 어떤 우울을 읽게된다. 경쾌하거나 발랄함과는 반대편에 서있는 일상과 정조가 가득하다. 작가는 풍경에 감정을 대입해서 그림을 그려나간다. 풍경과 작가의 감정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마치 15세기 신비주의자들이 경험했던 대우주(자연)와 소우주(인간)의 운명적 연결관계처럼 상호 은유적으로 관계한다. 작가가 그동안 전시 제목으로 썼던 키워드들은 밝지않다. ‘나의 자리’, ‘닫힌 방’, ‘우리라는 우리’ 등 혼자 동떨어져 있고 고독하고 슬프고 힘든 상태의 인물이 반복된다. 그 인물은 화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 아주 작아진 인간, 위축하고 무기력한 작은 사람. 지난 시기 몇년간 전시를 보면 시간과 사건이 정지한 상태, 활기없는 정체된 자아를 표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리적이란 작가의 감각과 감정, 신체와 신체의 관계, 성장과정에 겪는 구체적인 경험들, 사건들과 관련된다. 회화이미지는 일종의 심리적인 풍경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을 분석한다는 것은 작가의 심리와 정신을 분석하는 것과 오버랩될 수도 있다. 나는 우리라는 가면과 관계 속에 숨어있다. ‘나’가 되기위해서는 ‘우리’와 절연하고 극복해야한다. 나와 우리의 관계설정, 우리 사이 또는 나와 너의 관계가 이면에 깊이 자리한다. 우리라는 세계는 착각이거나 가짜일 수 있다. 한 사회나 단체의 일원으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심리상태를 재현한다.1)
사람의 심리를 깊이 사색하고, 더 깊은 마음의 세계로 들어가면서 나는 해체되고 내가 모르던 나의 다른 모습을 접하게 되면서 두려움과 불안, 낯선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등이 혼재되며 무거운 존재의 의미, 존재의 중력을 경험한다. 회화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제공하는 매혹과 힘의 원천일 수 있다. 바로 인간 그 자체가 주제이기 때문이다.
2. 풍경(風景)
과거세대에 비해 우리 세대는 풍경을 상실한 세대다. 우리는 더 이상 순결하게도 세계와 접촉하고 삼투하며 감상하고 어떤 몰입과 사유의 깊이를 경험할 수 있던 시대를 살지 못한다. 풍경이란 한 시대에만 가능했던 시대정신이거나 한 시대의 분위기이다. 동아시아의 산수화(山水畵)와 풍경화는 다르다. 중국의 동진(東晉)시대의 고개지(顧愷之, 344년~406년 경)의 인물화의 배경으로 비중있게 등장하기 시작한다. 고구려벽화에도 초기 산수화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산수화의 기원은 동아시아의 토착적 사상인 음양, 풍수사상, 노자와 장자의 자연친화적 사유와도 만난다. 서구미술사에 등장하는 풍경이 과학적 관찰과 그 과정의 심리적 풍경으로 나아간다면, 동아시아의 산수는 보다 존재론적인 또는 형이상학적 사유로 나아간다. 풍경이 자연을 대상화하여 해석과 이해의 대상으로 인식한다면, 산수는 대상 이전에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自然)에 대한 경원과 자연과 합일하려는 것이다. 가장 협소한 또는 기계적 풍경은 지리학자들이나 토목기술자들이 제작하는 지적도(地籍圖)와 쌍생아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산수는 관찰이 아니라 체험 또는 의사체험을 닮았다. 산수에는 사람이 없거나 등장하더라도 개미처럼 작은 존재로 나타난다. 비약하면 사람은 죽어서 풍경이 될 수는 없지만 자연(산수)이 될 수는 있는 것이다. 풍경은 시대와 자연세계를 닮지만, 산수는 사람을 닮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 두 세계와 두 전통의 불가피한 오해와 갈등, 혼란을 겪는다. 이후 풍경아닌 풍경과 산수아닌 산수가 범람한다. 그러므로 20세기 현대미술에서 풍경화란 사실 자연과 세계를 분석하거나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세계를 빗대어 인간 자신을 이해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외계가 아니 풍경을 그리고 바라보는 인간(주체)을 이해하는 것으로 진화한다.
3. 감정·고백
고백은 독백과는 다르다. 독백은 소통의 ‘기술(技術)’이라면 고백은 ‘기술(記述)’이다. 회화의 과정을 벗어나면 자신이 드러나는 경험은 불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길게보면 심리적인 안정을 줄 수 있다. 죄의식이나 어떤 불확정적 상태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워나가며 남는 것이 꼭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냥 물질이나 감각의 찌꺼기일 수도 있다. 감정도 객관화된다. 비인간적인 비정서적인 요소가 꼭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별개의 차원이다. 또한 개관성을 지향하는 정신이 반드시 객관적이라거나 보편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객관성은 근대의 시대정신이나 일종의 우세한 관념인 것이다. 오히려 복고풍의 터너의 주관적인 인상과 풍경을 떠올린다. 풍경이라고 보지 말고 어떤 분위기로 보자. 18세기19세기 풍경화의 한 부분 또는 한 요소를 크게 확대한 인상을 준다. 더 올라가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배경을 이루는 신비한 풍경을 떠올리거나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이 풍경은 어디를 향하는가.2) 감정을 바로바로 드러낼 수 있는 회화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자화상같은 자기 고백의 형식을 추구한다.3) 탈객관화하거나 자화상으로서 작가 자신이 드러나는 하나의 방식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매우 어둡고 답답하고 우울하다. 작가의 이미지는 그런 것들이 점차 형태를 갖춰나가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작가는 진실한 어떤 것을 모색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긴장과 애매한 상태가 이미지에 그대로 재현된다.
김선영의 회화는 마치 상징처럼 작동한다. 마찬가지로 분위기나 뉘앙스도 하나의 상징처럼 작동할 수 있다. 보편성을 확보한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시대에는 그렇다. 각각의 개인이 경험한 세계와의 접촉의 사건들과 그 영향들을 모두 모으면 일상어로는 담아낼 수 없이 거대해지면 평범한 언어가 아닌 비범한 분위기가 필요해진다. 일종의 선문답과 같이 말없이 서로 눈만 마주쳐도 소통이 되는 그런 경지일 수도 있다. 만남과 소통을 지향하는 한 각각의 개인, 각각 세계는 눈을 마주치건 귀로 듣건 접촉의 사건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접촉한 (시각)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분열된 자아, 분열된 세계, 다층적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회화는 근대의 풍경을 아주 오래전 벗어난 풍경의 탄생 이전의 세계와 자연과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접촉을 향한다. 신비주의자들이 증언하는 완정성과 진정성이 인간 내면을 향해 흘러간다(流出). 김선영의 이미지들은 작가 내면에 복잡하게 겹쳐있는 다층성과 복잡성, 역동하는 감정과 심리를 재현하거나 닮으려는 운동을 기록한 또는 고백이기도 하다. ︎
︎
1) “우리는 사회라는 공간 안에서 그들이 제공하는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며 자연스레 그 본질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표면만 바라보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는 목표를 가지고 어떤 것에 도전하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 목표, 목적의 기준은 누가 정했을까? 사회가 인식시켜준 나의 자리와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방향이 다르다면? 혹은 나의 방향과 자리를 내가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인식의 틈 안에 있는 나의 감정은 어디로 흘러갈까? 나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모습들에 주목하고 표면 위에 둥둥 떠 있는 감정들의 내면을 살핀다.(작가 노트)” 2) “풍경을 보며 지우고싶은 사건이나 기억이 있을 때, 인화지 위에 올려진 감정만 지운다면 밑에는 객관적인 어떤 것만 남을 수 있을까? 그래서 작업을 시작했고 작업을 위한 사진을 찍기시작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나중에는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감정을 바로바로 기록하기로 생각해서 시작한 회화작업이다. 작업은 일종의 자화상같다고 생각한다. 일상에서 드러나지 않던 부분들이 이 작업을 통해 뭔가 해소되는 기분이다.(작가 인터뷰)
3) “나는 지금 현재도, 과거도 뚜렷하지 않는, 온전하지 않은 상황에 있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보게 되는 내 주변의 풍경들은 어쩐지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렇게 나는 미완의 인식에서, 개척의 변두리에서, 현재로 가는 길목에서 나는 나를 닮은 풍경을 만난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 나에게 덮어 씌어놓았던 겹을 하나씩 벗어내고 맨살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나의 맨살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을 닮은 이런 풍경을 화면으로 옮기는 일은 마치 자화상을 그리는 것처럼 경계에선 나를 표현하는 일이며 어떤 힘에 의해 움직인 내가 제자리에 서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작가 노트)” ︎
폭풍의 언덕, 영국식 해안의 절벽. 태풍이 불기전에 스산하면 꿀꿀한 날씨의 풍경들 가운데 그나마 가장 밝은 풍경을 고른 듯하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폭풍이 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언덕 위에 서있다. 마치 비장한 거대서사가 시작되기 직전의 전조(前兆)처럼 얼룩처럼 이미지가 번지고 치솟으며 펼쳐진다. 심상을 표현한 이미지 같지만 작가에 따르면 작품은 거의 실제 경험을 기반으로 제작됐다. 시리즈를 통해 점차 밝은 색조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일관되게 어떤 우울을 읽게된다. 경쾌하거나 발랄함과는 반대편에 서있는 일상과 정조가 가득하다. 작가는 풍경에 감정을 대입해서 그림을 그려나간다. 풍경과 작가의 감정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마치 15세기 신비주의자들이 경험했던 대우주(자연)와 소우주(인간)의 운명적 연결관계처럼 상호 은유적으로 관계한다. 작가가 그동안 전시 제목으로 썼던 키워드들은 밝지않다. ‘나의 자리’, ‘닫힌 방’, ‘우리라는 우리’ 등 혼자 동떨어져 있고 고독하고 슬프고 힘든 상태의 인물이 반복된다. 그 인물은 화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 아주 작아진 인간, 위축하고 무기력한 작은 사람. 지난 시기 몇년간 전시를 보면 시간과 사건이 정지한 상태, 활기없는 정체된 자아를 표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리적이란 작가의 감각과 감정, 신체와 신체의 관계, 성장과정에 겪는 구체적인 경험들, 사건들과 관련된다. 회화이미지는 일종의 심리적인 풍경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을 분석한다는 것은 작가의 심리와 정신을 분석하는 것과 오버랩될 수도 있다. 나는 우리라는 가면과 관계 속에 숨어있다. ‘나’가 되기위해서는 ‘우리’와 절연하고 극복해야한다. 나와 우리의 관계설정, 우리 사이 또는 나와 너의 관계가 이면에 깊이 자리한다. 우리라는 세계는 착각이거나 가짜일 수 있다. 한 사회나 단체의 일원으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심리상태를 재현한다.1)
사람의 심리를 깊이 사색하고, 더 깊은 마음의 세계로 들어가면서 나는 해체되고 내가 모르던 나의 다른 모습을 접하게 되면서 두려움과 불안, 낯선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등이 혼재되며 무거운 존재의 의미, 존재의 중력을 경험한다. 회화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제공하는 매혹과 힘의 원천일 수 있다. 바로 인간 그 자체가 주제이기 때문이다.
2. 풍경(風景)
과거세대에 비해 우리 세대는 풍경을 상실한 세대다. 우리는 더 이상 순결하게도 세계와 접촉하고 삼투하며 감상하고 어떤 몰입과 사유의 깊이를 경험할 수 있던 시대를 살지 못한다. 풍경이란 한 시대에만 가능했던 시대정신이거나 한 시대의 분위기이다. 동아시아의 산수화(山水畵)와 풍경화는 다르다. 중국의 동진(東晉)시대의 고개지(顧愷之, 344년~406년 경)의 인물화의 배경으로 비중있게 등장하기 시작한다. 고구려벽화에도 초기 산수화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산수화의 기원은 동아시아의 토착적 사상인 음양, 풍수사상, 노자와 장자의 자연친화적 사유와도 만난다. 서구미술사에 등장하는 풍경이 과학적 관찰과 그 과정의 심리적 풍경으로 나아간다면, 동아시아의 산수는 보다 존재론적인 또는 형이상학적 사유로 나아간다. 풍경이 자연을 대상화하여 해석과 이해의 대상으로 인식한다면, 산수는 대상 이전에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自然)에 대한 경원과 자연과 합일하려는 것이다. 가장 협소한 또는 기계적 풍경은 지리학자들이나 토목기술자들이 제작하는 지적도(地籍圖)와 쌍생아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산수는 관찰이 아니라 체험 또는 의사체험을 닮았다. 산수에는 사람이 없거나 등장하더라도 개미처럼 작은 존재로 나타난다. 비약하면 사람은 죽어서 풍경이 될 수는 없지만 자연(산수)이 될 수는 있는 것이다. 풍경은 시대와 자연세계를 닮지만, 산수는 사람을 닮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 두 세계와 두 전통의 불가피한 오해와 갈등, 혼란을 겪는다. 이후 풍경아닌 풍경과 산수아닌 산수가 범람한다. 그러므로 20세기 현대미술에서 풍경화란 사실 자연과 세계를 분석하거나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세계를 빗대어 인간 자신을 이해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외계가 아니 풍경을 그리고 바라보는 인간(주체)을 이해하는 것으로 진화한다.
3. 감정·고백
고백은 독백과는 다르다. 독백은 소통의 ‘기술(技術)’이라면 고백은 ‘기술(記述)’이다. 회화의 과정을 벗어나면 자신이 드러나는 경험은 불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길게보면 심리적인 안정을 줄 수 있다. 죄의식이나 어떤 불확정적 상태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워나가며 남는 것이 꼭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냥 물질이나 감각의 찌꺼기일 수도 있다. 감정도 객관화된다. 비인간적인 비정서적인 요소가 꼭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별개의 차원이다. 또한 개관성을 지향하는 정신이 반드시 객관적이라거나 보편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객관성은 근대의 시대정신이나 일종의 우세한 관념인 것이다. 오히려 복고풍의 터너의 주관적인 인상과 풍경을 떠올린다. 풍경이라고 보지 말고 어떤 분위기로 보자. 18세기19세기 풍경화의 한 부분 또는 한 요소를 크게 확대한 인상을 준다. 더 올라가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배경을 이루는 신비한 풍경을 떠올리거나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이 풍경은 어디를 향하는가.2) 감정을 바로바로 드러낼 수 있는 회화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자화상같은 자기 고백의 형식을 추구한다.3) 탈객관화하거나 자화상으로서 작가 자신이 드러나는 하나의 방식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매우 어둡고 답답하고 우울하다. 작가의 이미지는 그런 것들이 점차 형태를 갖춰나가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작가는 진실한 어떤 것을 모색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긴장과 애매한 상태가 이미지에 그대로 재현된다.
김선영의 회화는 마치 상징처럼 작동한다. 마찬가지로 분위기나 뉘앙스도 하나의 상징처럼 작동할 수 있다. 보편성을 확보한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시대에는 그렇다. 각각의 개인이 경험한 세계와의 접촉의 사건들과 그 영향들을 모두 모으면 일상어로는 담아낼 수 없이 거대해지면 평범한 언어가 아닌 비범한 분위기가 필요해진다. 일종의 선문답과 같이 말없이 서로 눈만 마주쳐도 소통이 되는 그런 경지일 수도 있다. 만남과 소통을 지향하는 한 각각의 개인, 각각 세계는 눈을 마주치건 귀로 듣건 접촉의 사건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접촉한 (시각)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분열된 자아, 분열된 세계, 다층적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회화는 근대의 풍경을 아주 오래전 벗어난 풍경의 탄생 이전의 세계와 자연과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접촉을 향한다. 신비주의자들이 증언하는 완정성과 진정성이 인간 내면을 향해 흘러간다(流出). 김선영의 이미지들은 작가 내면에 복잡하게 겹쳐있는 다층성과 복잡성, 역동하는 감정과 심리를 재현하거나 닮으려는 운동을 기록한 또는 고백이기도 하다. ︎
︎
1) “우리는 사회라는 공간 안에서 그들이 제공하는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며 자연스레 그 본질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표면만 바라보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는 목표를 가지고 어떤 것에 도전하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 목표, 목적의 기준은 누가 정했을까? 사회가 인식시켜준 나의 자리와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방향이 다르다면? 혹은 나의 방향과 자리를 내가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인식의 틈 안에 있는 나의 감정은 어디로 흘러갈까? 나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모습들에 주목하고 표면 위에 둥둥 떠 있는 감정들의 내면을 살핀다.(작가 노트)” 2) “풍경을 보며 지우고싶은 사건이나 기억이 있을 때, 인화지 위에 올려진 감정만 지운다면 밑에는 객관적인 어떤 것만 남을 수 있을까? 그래서 작업을 시작했고 작업을 위한 사진을 찍기시작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나중에는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감정을 바로바로 기록하기로 생각해서 시작한 회화작업이다. 작업은 일종의 자화상같다고 생각한다. 일상에서 드러나지 않던 부분들이 이 작업을 통해 뭔가 해소되는 기분이다.(작가 인터뷰)
3) “나는 지금 현재도, 과거도 뚜렷하지 않는, 온전하지 않은 상황에 있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보게 되는 내 주변의 풍경들은 어쩐지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렇게 나는 미완의 인식에서, 개척의 변두리에서, 현재로 가는 길목에서 나는 나를 닮은 풍경을 만난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 나에게 덮어 씌어놓았던 겹을 하나씩 벗어내고 맨살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나의 맨살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을 닮은 이런 풍경을 화면으로 옮기는 일은 마치 자화상을 그리는 것처럼 경계에선 나를 표현하는 일이며 어떤 힘에 의해 움직인 내가 제자리에 서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작가 노트)” ︎